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13.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3부. 6.25 전쟁 [7] 인물탐구 김일성

남보르 2018. 11. 15.


"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를 알 수 없다.

이야기로 만나는 토크멘터리 전쟁史"


민족 대역죄인 김일성에 대해 알아보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이름 '김일성' 북한에서는 김일성 장군이라 불리며 왕 그 이상의 권력까지 얻는 이 인물에 대해 토크멘터리 전쟁사 패널이신 이세환 기자님은 이러한 평을 내리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 - 이세환 기자


왜 이세환 기자는 이러한 최악의 평을 내렸을까?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625전쟁을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전쟁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않는다.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유지와 승계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불사한 최악의 전범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이념이 불확실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사람이 자신의 야욕을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사후에 그의 핏줄로 이어지는 김씨세습의 모습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세습시키기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련의 힘을 빌려 아무렇지 않게 같은 민족끼리 피를 갈구하며 그 피에 대한 대가를 혹독히 치루게 되는 전쟁이라는 방법을 택하였고, 이는 한민족이 70년 동안 갈라지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이 명백한 길을 가게 되었다.


민족 대역죄인 김일성(1912~1994)


김일성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625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을 일으킬 기반도 능력도 되지 않는 그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소련이 지지를 하게된 이유가 무엇일까?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되면서 우리나라도 해방을 맡게되는데 이 때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사령부 소속 제88국제여단의 대위계극장을 달고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국은 남한에 그리고 소련은 북한에 들어가면서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은 북한에도 공산주의 정권을 정착시킬 꼭두각시 역할을 잘 수행할 인물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이 때 스탈린의 눈에 든 인물은 두 사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1900~1955)이었다. 그 중 김일성이 스탈린의 간택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박헌영은 소련으로 공산주의 유학파 출신으로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는데 스탈린 입장에서는 말잘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한 상태였으므로 논리적으로 부딛히는 박헌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렇게 행동대장 격인 김일성이 스탈린의 선택을 받게 된다.


박헌영과 김일성 그리고 김일성의 끊임없는 남침건의


잘알려져 있기를 김일성이 남침을 하기위해 스탈린에게 40여회의 거부를 당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이 남침 건의 목적으로 스탈린을 찾아간 것은 2회였다. 


첫번째는 1949년에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을 밝히고 포부를 제시했으나 스탈린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퇴짜를 맞는다. 대신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무기와 장비를 지원한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미리 대응 할 수 있도록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보내는 등 남침 허락은 하지 않았지만 전쟁 준비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두번째는 1950년 3월에 제시한 남침 건의는 수락을 한다. 스탈린은 당시 한반도 정세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수락하게 된다. 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정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1949년 06월 :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 완료

1949년 10월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50년 01월 : 미국 에치슨 국무장관의 에치슨 선언


미군이 완전 철수했고, 또 하나의 공산국가인 중국이 안정되었으며, 미국의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극동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에치슨 라인이 설정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역알못(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아도 전쟁이 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 지고 있다는 것은 느낌상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치슨 선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있어서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김일성은 에치슨 선언이 일어나고 두달 후 모스크바로 직접 가서 스탈린을 알현하였고 그렇게 전쟁 승인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민족의 비극은 1950년 6월 25일 벌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에 김일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조금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전쟁 전 김일성의 평가는 그리 높지가 않았다. 625전쟁 전 전쟁 준비, 계획수립, 전략, 훈련 등 모든 군사적 업무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도맡아 했으며 이 군사고문단의 3대 단장이 바로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은 바실리예프 중장이었다. 


이 말은 곧 김일성은 당시 김일성 장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쟁준비와 계획에 아무런 실권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자리만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평가가 좋을리 만무했다. 


김일성의 계속된 전쟁도발


게다가 625가 기습남침을 감행하고 많은 희생을 강요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열악한 상태의 공산당 군대가 미국이라는 거대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것을 지켜본 김일성은 자신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무장 게릴라 조직을 침투시켜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여 통일을 하려한다. 


1968년 1월 : 1. 21사태(김신조 사건)

1968년 10월 :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0년 6월 :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1974년 8월 :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1974년 11월 : 제 1 땅굴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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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1950년대 부터 2010년대까지 70여회 도발을 감행해왔다.


세계사 최악의 독재자, 전범으로 알려진 히틀러조차 자국의 국민은 사랑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동족이자 한민족인 대한민국에 수없이 도발을 감행하고 지속적으로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며 긴장수위를 높여왔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과 손자인 김정은에 이르러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최악의 독재자이자 민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불신이라는 벽을 만들어버린 민족 대역죄인이자 최악의 전범 김일성..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러한 인물과 전쟁이 나타나지 않고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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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3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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