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11.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3부. 6.25 전쟁 [5] 승호리 철교 폭격 작전

남보르 2018. 11. 13.


"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를 알 수 없다.

이야기로 만나는 토크멘터리 전쟁史"


미군도 포기한 철통방어망을 뚫고 다리를 폭파시키다

때는 1952년 1월.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1950년 9월 15일에 있었고 기세를 타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 후 10월 19일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함락한 이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6일에 평양을 다시 내어준 상태로 전선이 크게 전쟁 초기만큼 크게 움직이지 않고 고착화되어 갔다.


휴전협상이 계속 길어지면서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국지전들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1952년 1월 추운 한파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에서 지속적으로 군수물자를 공급받고 있었고 이는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승호리 철교를 통해 막대한 물자들이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는 상태였다.


미군과 국군은 모두 이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여 북한의 물자 공급을 차단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당시 북한도 승호리 철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대공망을 형성하여 철저히 방어하였다.


승호리 철교의 위치와 철저한 대공방어망


국군 특히나 역사가 짧았고 비행기조차 미군에 비하면 형편없던 대한민국 공군이 어찌하여 이러한 중요한 공대지 공격 작전을 맡게 되었을까? 


당시 미군은 이미 승호리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500여회의 공격을 감행한 후 였다. 모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현대에 이르러서 비행기를 이용한 폭격은 미사일을 통한 정밀 폭격이 가능했지만 당시에는 폭탄을 실은 비행기체를 철교가 육안으로 보이는 낮은 고도까지 내려가서 눈으로 다리 위치를 확인하여 폭탄을 떨어트려 다리를 폭파 시켜야만 했다.


공중에서 보면 다리는 실처럼 얇게 보이기 때문에 매우 낮은 고도까지 내려와야했는데 이 때 기체는 북한의 대공포들의 먹이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최고의 미공군이라도 당시로서는 큰 해결방안이 없었다. 미공군 내부에서는 자체 작전수행에 파일럿들이 부담을 느꼈고 이 작전은 대한민국 공군에게 슬쩍 넘겨지게 되는데 대한민국 공군은 이 난공불락의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을 단 3차례 출격만에 성공하게 된다. 


미공군의 B-29 폭격기와 대한민국 공군의 F-51D 전폭기


미공군이 폭격에 이용했던 기체는 '하늘의 요새'라 불리우던 B-29 폭격기 편대를 이용한 융단폭격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했으나. 국군은 '무스탕'이라고도 불리었던 F-51D 전폭기를 사용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무스탕 도입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백두산함 도입에 버금가는 눈물겨운 도입이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10대의 무스탕을 받았으나 대한민국 공군에게는 운용할 노하우나 비행기를 조종할 교육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한반도 역사상 처음 도입되는 비행기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공군 병력들은 일본으로 넘어가서 2~3주간의 초단기 교육만을 받고 복귀하게 된다. 이 교육량은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일반 보병의 임무숙지 기간보다도 짧은 어처구니 없는 교육 및 훈련량이었다. 


교육기간동안 실제 비행이수 시간은 30~45분 내외로 사실상 떳다가 착륙해본 경험만을 가지고 교육을 끝마치고 복귀하게 된다. 미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서로 형태의 작전을 사용했다.


미공군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목표물에 다다를때 까지 수평으로 고도를 유지한 채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대한민국 국군은 죽음을 무릎쓰고 목표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급강하 폭격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사실 대한민국 공군이 내세운 방식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가능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군 조종사들이 얼마나 큰 각오로 이 작전에 임했는 이해가 가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 결국 대한민국 공군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작전을 단 3번의 출격만에 성공하게 되지만 미공군에서는 처음에 이 보고를 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까지 미군은 실패를 하지 않는 군대였고, 특히나 자신들이 지원하는 군대에게 공적을 빼앗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미군이 지원한 동맹군이 전투를 승리로 가져오는 경우는 6.25와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이 거의 유일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당시 공군 전대장이었던 백범 김구의 차남 김신 대령


당시 작전이 얼마나 불가능해 보였으면 미공군 참모들끼리 작전 성공에 대해 인당 50달러씩 내기를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내기는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전대장이었던 김신 대령이 작전 복귀 후 한 미군 참모에 의해 환대를 하는 통에 알려지게 되는데 이 참모는 대한민국 공군의 작전 성공에 내기를 걸었고 이에 감사를 표하는 통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도입한 비행기 그리고 목숨을 내놓는 과감한 작전에 승호리 철교는 폭파되고 북한은 대동감 이남의 전선 보급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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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3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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