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8.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3부. 6.25 전쟁 [2] 백두산함 전투

남보르 2018. 10. 23.



"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를 알 수 없다.

이야기로 만나는 토크멘터리 전쟁史"


육해공 그리고 해병대

우리나라 영토 그리고 영해, 영공을 수호하고 유사시에 적진으로 파고드는 역할을 맡는 4개군을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해병대로 부른다. 6.25 전쟁 당시에도 군창설 초창기의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 조직의 큰 틀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6.25의 수많은 전투들이 있지만 각 군을 대표하는 전투로 아래와 같이 꼽는다.

육군 : 영천전투

해군 : 백두산함 전투

공군 : 승호리 철교 폭격작전

해병대 : 진동리 전투


왜 이 전투들이 6.25 전쟁 당시 각 군을 대표하는 전투로 꼽히는지 천천히 알아보자. 먼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일어난 전투들 부터 알아보자.



백두산함 전투의 진행


백두산함 전투

북한은 6.25 전쟁 계획 당시에 육군과 해군의 합동작전을 통해 전쟁을 한달 내에 마무리지으려 했다. 육군은 거의 계획대로 속전속결로 밀고내려와서 거의 목표를 이룰뻔했으나 남한 후방 교란을 목표로한 해군의 특수부대 침투가 남한 해군에 의해 저지 당한다. 


백두산함 전투가 바로 이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게릴라 600명을 태운 무장수송선과 백두산함과의 전투이다. 부산은 남한의 남쪽관문으로 유사시에 부산을 통하여 물자, 병력 등이 수송되는 중요한 전략적 포인트였다. 만약 이 부산이 점령당하거나 혹은 게릴라에 의해 항구가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면 미국을 포함한 UN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사실 백두산함 전투의 의의가 생각보다 크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6.25전쟁의 분수령" - 미국의 역사학자 노만존슨(Norman woodason johnson, 1930-2017)


이 전투가 더 극적인 이유는 6.25전쟁에서의 남한의 첫 승리를 알리는 전투였던 이유도 있지만, 이 백두산함을 갖기위해 들였던 노력은 지금의 시대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소서! 배가 없이는 바다에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손원일


해군이 창설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변변찮은 배한척 없는 그야말로 장부속 가짜 해군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말 해군에 함정이 한개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 일인가? 당시에 굶주리고 가난했던 해방 후 대한민국의 사정이 실제로 그리하였다.


1949년 6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함정건조기금거출위원회'라는 걸출한 모임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해군으로 편제되었던 해군 장교, 병사들이 자신들의 월급을 털어서 만든 요즘으로 말하면 '함정펀딩'이다. 


장교들은 5~10%의 월급을 각출했으며, 수병들은 부대에서 발생한 고철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고, 장교들의 부인들은 미군에게 증여받은 재봉틀 50여대로 삯바느질을 해가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함정을 보유하고자 했다.


기금은 4개월만에 1만 5천달러가 모였으니 당시 금액으로는 상당한 규모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4만 5천달러의 지원금을 내놓아서 총 6만달러라는 금액이 마련된다. 허나 이 금액으로 신형군함을 구매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미국 해양대학교에 있던 이미 퇴역한 초계정 '화이트헤드 소위호(Ensign Whitehead)'를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배는 퇴역한 배였기 때문에 엔진만 구동이 가능했고, 우리나라 해군장교들이 2달간 숙식하며 이 배를 수리하여 들여오게 된다. 귀국길에 화와이에 들려 3인치 함포를 구매하고 괌에 들려서 실탄 100발을 구매하여, 마침내 6.25 전쟁 발발 두달 전인 1950년 4월 10일에 우여곡절 끝에 진해항에 입항한 이 배가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다. 


전쟁이 발발하던 날 백두산함은 진해에서 훈련중이었으나 해군본부의 명령에 의해 묵호로 출항하여 발견하는 적을 괴멸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운이 좋게도 부산으로 이동중이던 정체불명의 선박을 발견하게 되고, 이는 북한 특수부대를 태운 무장수송선임을 확인하고 해군본부에 보고하여 드디어 격침 명령이 하달된다.


백두산함의 실탄 사격경험은 고작 5발. 비싼 실탄값에 제대로된 실전 훈련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한시간 가량의 전투가 이어졌고 마침내 하와이에서 구매했던 그 3인치 함포의 포탄이 적함에 명중하여 북한무장수송선은 격침된다. 이 전투에서 두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데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전투당시 심각한 부상으로 생사를 해매다 적함이 격침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전쟁 개전 첫날 부산으로 들어오는 특수부대 게릴라 600명을 바다에 수장시켰고 이로써 위에서 육군으로 신속전개하고 부산에서 후방을 교란하려던 북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만약 백두삼함의 귀환이 늦어져 6월이후에 대한민국에 도착했다면? 장교 병사들의 나라사랑에서 이루어진 모금이 없어서 백두산함을 구매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 우리는 공산화되어 있는 나라에서 자유를 빼앗긴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역사이야기이지만 비교적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가고 마음이 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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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3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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