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10.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3부. 6.25 전쟁 [4] 영천 전투

남보르 2018. 11. 7.


"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를 알 수 없다.

이야기로 만나는 토크멘터리 전쟁史"


육군 반격의 서막 영천전투

북한은 1950년 6월에 시작한 전쟁은 광복절인 8월 15일안에 끝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대구 다부동, 마산, 밀양 등 부산으로 가는 길목을 주구장창 두들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 지역들은 미군의 방어선이었고 강한 저항으로 방어선을 잘 지키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목표였던 8월 15일이 지나고서는 그들은 목표를 조금 수정하여 대한민국 육군이 지키고 있던 영천을 공격한다. 영천은 부산으로 가는 다섯개의 길목 중 3개의 길목이 지나는 전략적 요충지로 한미연합군이나 북한이나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다.


북한의 8월 집중 공세지역과 9월 공세지역인 영천과 영천을 통한 공격로


부산으로 가는 5가지 루트

1. 포항 > 울산 > 부산

2. 경주 > 부산

3. 대구 > 부산

4. 삼랑진 > 부산

5. 마산 > (진동리) > 부산


이전 포스팅 6.25전쟁 3편 진동리 전투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 5가지 중 영천을 차지하면 1, 2, 3번 루트인 포항, 경주, 대구로 가는 길을 모두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대구는 당시 UN지상군 총사령부, 미8군사령부,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연합군 사령부가 모두 포진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대구로 가는 길을 한번에 확보 할 수 있는 영천은 매우 중요했다.


전투가 치열해지는 와중에 영천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미8군사령부와 육군본부가 모두 부산으로 이전한 것을 보면 영천의 전략적인 가치가 어느정도 였는가 가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영천전투에서 패했을 경우 미국은 대한민국을 포기할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당시 UN군은 상륙작전 등 반격의 계획을 세우는 상태였지만 이 가정은 낙동강 전선이 지켜지고 부산이 온전한 상태에서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영천과 부산과의 거리 그리고 낙동강 안쪽에 위치한 영천.


영천이 떨어지면 부산을 온전히 지키기 힘든 형세였고 실제로 영천이 잠시 함락되었기도 했다. 이때 미군사령부에서는 2개 사단 규모의 정예군과 함께 10만명 규모의 망명정부를 준비하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명령하기도 하였다.


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국군이 영천에 반격을 가한 끝에 수복해 내었을 때에 비로소 망명정부 건의 이야기는 잠잠해졌다. 재미있는 건 영천전투와 비슷하게도 UN군과 국군이 북한의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소련에서도 북한에 만주 임시정부 계획을 세웠던 것을 보면 6.25 전쟁은 냉전 이전에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육군은 이 영천전투의 승리이전에는 8월까지 북한의 강한 공세에 수세로 맞서고 있었지만, 이 전투의 승리로 북한 제15사단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공세로 태세변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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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3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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