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7.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3부. 6.25 전쟁 [1] 민족비극의 시작

남보르 2018. 10. 16.


"전쟁을 알지 못하면 역사를 알 수 없다.

이야기로 만나는 토크멘터리 전쟁史"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아냐??"

"방심해서!!"

하며 불알을 치고 도망갔던 어릴적 내 짝꿍녀석이 생각난다. 


6.25전쟁은 80년대생인 내가 어릴적만 해도 6.25전쟁은 그리 오래전에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사회는 경직되고 반공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6.25전쟁이 조선시대에 일어난줄 알고 있는 어린 학생들은 물론 전쟁에 대한 배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넘쳐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6.25 전쟁이 어떠한 경위에서 일어났는지 시대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알아보자.


6.25전쟁을 요약하면 다음 두가지 핵심사항이 남는다. 

1. 북한의 기습 남침

2. 21개국 다국적 UN군 참전


북한의 전격적인 기습 남침 그리고 21개국 UN군이 참전하고 물자지원을 보내온 국가가 39개국인 사실상 작은 세계대전이었던 전쟁. 이 크나큰 힘의 충돌 앞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낸 전쟁. 이 두가지 사실이 6.25 전쟁이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북한의 일방적인 기습공격에 한반도는 3년동안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이 땅에서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 시작됐다. 한반도의 허리부근인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남침을 시작했다. 여기서 남침과 북침이 항상 헷갈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앞으로 평생동안 이 개념이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남침과 북침 무엇이 맞는 것이냐!?
똥침을 생각해보자. 

똥침은 내 똥꼬가 친구녀석의 손가락에 의해 침략당하는 행위이다.

똥꼬가 침략당했기 때문에 똥침이다.

따라서 6.25전쟁도 남한이 침략당했기 때문에 남침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면 일단 북한 군대에 의해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번 요약을 해보자.


1950년 6월 25일 : 북한의 기습남침

1950년 9월 15일 :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28일 : 서울 수복

1950년 10월 8일 : 마오쩌둥의 중공군 참전 통보

1950년 10월 19일 : 압록강을 건너선 중공군

1951년 7월 10일 : 휴전협상 시작

1953년 7월 27일 : 정전협정 타결


위에서 보이는대로 6.25전쟁은 밀고 밀리다가 결국 어느쪽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종전'이 아닌 '정전'으로 마무리한 전쟁이다. 종전선포가 된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6.25전쟁의 연장에 서있고 이 전쟁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력 또한 질적인 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6.25 당시에는 남한의 경제력보다 북한의 경제력이 우수했고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군사력 또한 남한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에는 얼마나 남북의 군사력 차이가 존재했던 것일까?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자료


남한과 북한은 부대편제부터 무기까지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나 남한에서 한대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전차의 경우 북한은 무려 242대를 보여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남한병력은 전차를 처음본 인원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전쟁초기 대처법을 알지 못하여 몸으로 육탄전을 치뤄 전차를 막는 등 전력의 차이는 현격했다.


특히 미군정에 의해 정치적으로 간섭을 받던 6.25전쟁 전에는 6만 5천명이라는 병력제한을 당했는데, 당시 북한군의 동향을 볼 때 이는 너무 제한된 병력 수 였으므로 미국의 허락을 받아 10만명 까지 편제를 늘려놓은 상태였다. 돌려말하면 3만 5천명 분의 장비 및 무기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개전 초기에는 북한군 병력을 막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국군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하면 군복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제가 남긴 군복, 철모 등을 사용했었고, 식량보급도 형편없어서 하루에 주먹밥 한개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였다.


다른 놀라운 이야기를 하자면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38선 부근에서의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6.25전쟁 직전까지 무려 1,000여회의 국지전이 일어났다. 1949년 6월 말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하면서 스탈린의 남침허가가 가시화 되어가면서 전쟁준비를 하던 북한은 국군의 대응방식과 전력을 알아보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을 했던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준비가 끝났을 때 그렇게 6.25는 시작되었다.


국군의 4대 전투


6.25 전쟁은 수많은 전투들로 이루어졌고 그 중 어느하나 중요하지 않은 전투가 있었으랴... 그러나 국군의 각군을 대표하는 전투를 한가지씩 꼽자면 육군의 영천전투, 해군의 백두삼함 전투, 공군의 승호리 철교폭격작전, 해병대의 진동리 전투를 꼽을 수 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전투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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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3부.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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