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야기/토크멘터리 전쟁史

16. 글로 보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 4부. 걸프전쟁 [3] 전세계에 생방송된 전쟁

남보르 2018. 11. 27.


영화의 한장면 아니야? 미디어가 이용된 전쟁

무기는 물론 기후까지 첨단 시스템을 이용해 계산하여 진행했던 전쟁인 만큼 미국은 걸프전에서 전술적으로도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걸프전의 전술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1단계 사막의 방패작전(Desert Shield)

2단계 사막의 폭풍작전(Desert Storm)


사막의 방패작전(Desert Shield)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듯이 사우디아라비아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10만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할 계획을 1차적으로 세우고 실제로 작전도 상당히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1990년 8월 2일에 시작되었는데 미국의 82공수사단 2여단이 먼저 4천명의 낙하산 공수병력이 8월 9일에 침공 일주일만에 가장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나서 8월 17일에 아파치 헬기 18대를 비롯한 항공전력이 속속 도착하고 본격적인 전투준비에 임한다. 여기까지가 사막의 방패작전으로 사실 공세적인 작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명한 작전은 아니나 미국 우방인 사우디를 방어하고 공격의 교두보를 성공적으로 마련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작전이었다.


이라크 공격의 선봉을 선 아파치 헬기


사막의 폭풍작전(Desert Storm)

걸프전의 유명한 작전으로 우리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공격들이 이 사막의 폭풍작전에 해당한다. 이라크는 수도인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레이더기지를 포함한 방어시설들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을 만큼 낮은 고도인 15m의 높이로 저고도로 침투한 AH-64 아파치 헬기의 공격에 허무하게 전략적 주요 거점들이 모두 파괴된다. 


새벽시간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아파치헬기의 공격에 너무나 무력하게 이라크 군은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버린다. 공습이 계속되어가고 이라크 군도 공중폭격을 피해서 레이더를 오히려 끄고 사막 곧곧에 숨어서 은폐를 한다. 레이더를 사용해 공대공미사일로 대공방어를 해야할 기지들이 레이더를 통해 역추적당할 위험에 스스로 레이더를 끄고 숨어야 할 만큼 공습은 맹렬했다.


그러다 보니 미군은 이라크 군의 대공레이더기지들이나 거점들을 파악하기 위해 무인정찰기인 드론(Drone)을 사용한다. 정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전이라 불릴만한 전쟁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뿌려진 수많은 드론들은 대공망을 정찰하는 것은 물론 이라크군에게 일부러 격추를 당하면서 이라크 군을 교란시켰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 드론이라는 개념이 최초였으므로 이라크 군은 자신들이 격추시킨 비행기들이 미국의 전폭기들로 확신하고 있었다.


드론을 이용한 최초의 현대전 걸프전


드론을 사용한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걸프전은 전쟁장면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충격적인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으로 이미 유명했던 종군기자인 피터 아네트(Peter arnett, 1934~)는 걸프전 당시 공습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바그다드 현장에서 이라크 현지의 공습장면을 담아냈다.


피터 아네트는 바그다그 시내 호텔에서 CNN을 통해 바그다드 첫날 공습장면을 내보냈다. 야간투시 카메라로 찍은 대공포가 불을 뿜고 미사일이 떨어지는 바그다드 시내의 모습은 당시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자아냈고, 이 장면들은 이 후 현대전을 다루는 수많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전쟁 장면의 생중계는 결국 미국의 보도통제까지 이어질 만큼 사회적으로 영향이 컸다. 사회적으로 영향이 크다는 것은 이것을 미디어가 이용하면 큰 무기가 된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미군 내에서는 베트남전의 패배는 미국 내 반전여론을 잡지 못해 추가적인 지원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베트남증후군(Vietnam syndrome)이라는 용어까지 사용되었다.


전설적인 종군기자인 피터 아네트와 바그다드 공습장면


이를 반면교사 삼아 걸프전은 미디어를 이용해 미국내 여론을 전쟁에 유리한 여론으로 만드는 언론플레이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이를 수행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걸프전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처절함은 전혀 기억나지 않은 채 최첨단 무기로 공습하는 첨단 현대전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을 만큼 미국의 미디어 이용은 효과적이었다.


이는 미국내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것 뿐만아니라 이라크 내 사기를 꺾는 역할도 수행했었다. 미국이라는 강력한 국가의 공격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전쟁의지의 제거라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디어의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미국이지만 결국은 큰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미국의 강력한 공격에 설상가상으로 1991년 2월 24일 다국적군은 본격적으로 지상전을 전개하고, 이에 따라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철수를 결정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름하야 '죽음의 고속도로' 사건으로 미군은 2월 27일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잇는 80번 고속도로를 통해 철수하던 이라크군에게 무차별적인 공중폭격을 가하고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이라크군 수만명이 대학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중에 학살이라니? 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으나 이미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본국으로 철수하던 병력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공격이었기 때문에 전쟁폭력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큰 비난을 받게 된다. 


"도망가는 이라크 군의 등뒤에 총을 갈긴것!"


여론은 비난일색으로 들끓었다. 들끊는 여론에 전쟁수행은 군사적인 작전전개보다는 정치적인 상황을 매 작전에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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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방TV 유투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4부. 걸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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